「프리」인디핑크러브

 민채빈이 기억하는 연소예와의 첫 만남은 그곳이었다. 기숙사 현관. 수도권에 위치한 명문대에서.
 채빈은 첫 학기가 막 시작할 무렵 새내기 오티와 뒤풀이로 여즉 정신이 없었다. 주전공 이수 조건과 복수전공, 부전공 설명을 필기하며 듣고, 자신이 운영하는 동아리에 들어오라 영입하려는 교수님과 선배들의 말씀을 새겨듣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으며, 뒤풀이에서 성향이 잘 맞아 말 놓은 동기가 알고 보니 신입생인 척하는 엑스맨인 걸 알아서 더더욱.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안면은 쉽게 텄다는 것 정도일까. 이번 문예창작과에 차석으로 입학했다는 소문이 퍼져 더욱 그랬다. 다만 간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게 문제였다. 워낙에 표현에 서투르고 내성적인 성격인지라, 일일이 대꾸하는 것도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1차만 하고 빠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2차까지 갔더니 기숙사에 돌아가는 길이 멀어도 너무 멀었다. 뒤풀이는 원래 이렇게 오래 하는 건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벌써 하늘이 밝고 있었다. 통금이 없는 기숙사인 게 다행이었다.
 카드를 찍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동안 채빈은 제 동거인에 관한 생각을 치워두고 있었다. 맨정신으로 동기들과 선배들의 술주정을 다 받아주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뻐근한 목을 스트레칭하고 별생각 없이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삐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고개를 들자 낯선 이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 얼굴이,

 ‘아 혹시, 에타에 맨날 올라오던 국문 ㅇㅅㅇ가 혹시 이분인가…….’

 낯선 이에 대한 첫 감상은 그거였다. 명문대 학생이라는 칭호가 걸맞은 맑고 귀티 나는 얼굴. 청순한데 화려하다. 그가 입은 인디핑크 니트는 마치 제 주인을 찾은 것 같았다. 채빈이 평소 즐겨 입던 옷이었음에도. 단언컨대 사람의 외모를 보고 이토록 놀란 것은 과장 좀 보태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 키에 저 외모는 좀 불공평하지 않나? 새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채빈은 다시금 실감했다. 멍하니 그의 외모를 감상하자 그가 멋쩍은 듯 한쪽 볼을 긁적였다.

 “안 들어오세요?”
 “아,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선다. 조금은 실례였으려나.
 워낙에 시간이 안 맞았던 탓에 채빈이 동거인의 낯을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채빈이 기숙사 입실을 늦게 한 점도 있었고. 방금 막 기숙사에 들어온 신입생이 곁눈질로 동거인을 살핀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동거인의 눈길이 잠시간 채빈에게 닿는다. 영 불편한 눈치는 아니었다. 채빈은 심장이 마구잡이로 들뛰는 것을 느꼈다. 마치 잘못을 하다 들킨 사람마냥.
 잠시간 소통 없이 눈치싸움이 이어졌다.
 새가 막 깨어난 아스라한 새벽.

 “이름이 어떻게 돼요?”

 침묵을 깬 것은 채빈의 해묵은 듯한 질문이었다.

 “아, 전 국어국문학과 22학번 연소예라고 해요.”

 꼭 자신을 닮은 예쁜 이름이었다.

 “당신은요?”

 머잖아 질문이 돌아온다. 그쪽이라고 칭할 법한데. 말을 고르는 태가 났다.

 “아, 저는…… 문예창작과 23학번 민채빈입니다. 저보다 선배님이신데, 말씀 편하게 하세요.”

  말을 놓으라는 채빈의 제안에 소예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 정적. 두 사람 다 나서서 말을 하지 않는 성향 탓에 기숙사 내에는 다시 침묵만이 가득했다. 고동치던 채빈의 심장은 아직도 제 존재를 피력하고 있었기에, 혹여나 소리가 들릴까 싶어 애써 바스락대며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소예는 잠시 그런 채빈을 응망하다가 잘 준비를 하러 화장실로 갔고, 채빈은 그사이에 옷장에 잠시 시선을 던졌다.
 그 니트는…… 중고로 팔거나 해야겠다.





 인디핑크러브





 하지만 안타깝게도 니트의 존재 여부는 소예에게 금방 밝혀지고 말았다. 개강 바로 다음 날, 빈티지 샵에 니트를 팔기 위해 잠시 꺼내두고 공용라운지로 간 사이 소예가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옷을 본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동거인의 공강 시간을 파악하는 게 먼저이지 않았나 싶었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돌이킬 수 없는 것을. 기숙사로 돌아와 잔뜩 당황한 채빈에게 소예는 슬쩍 웃으며 말을 붙였다. 간지러운 목소리였다.

 “채빈 씨도 이 옷 가지고 있었나 봐요? 난 왜 못 봤지?”

 묻는 말에 기분 좋은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그 질문에 채빈은 퍽 난처한 듯 뺨을 문지른다.

 “입은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것보다 말 놓으시라니까…….”
 “아 맞다. 미안, 남이 존댓말을 사용하면 나도 잘 못 놔서. 그냥 너도 말 편하게 할래?”
 “……천천히, 편해지면 놓을게요. 지금은 불편하다는 게 아니고 그냥 좀 그래서요.”

 변명이 아니라 진짜 그랬다. 눈썹을 늘어뜨리며 곤란한 듯 웃는 채빈을 보며 소예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음, 그래. 근데 채빈아, 너 니트 어떤 브랜드에서 샀어?”
 “제대로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아르댓… 일걸요.”
 “진짜? 나도. 개인적으로 그 브랜드 옷을 좋아하는데,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좀 아쉽다고 생각했어.”

 사르르 웃는 소예의 얼굴을 본 채빈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있더니, 곧 정신을 차리고 따라 웃었다. 괜히 귀가 벌게졌다. 잠깐 잠잠하게 식었던 심장의 고동이 도로 요동치기 시작한다. 뜨거운 감정이 입 밖으로 넘쳐흐를 것처럼 울렁거렸다. 얘기를 나눌 때마다 소예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화답한다. 대화를 할 수록 생각이 허예졌다. 니트는 팔아버리려고 밖에 내놓았던 건데. 소예는 그것도 모르고 채빈과 자신의 공통점을 찾고 있었다. 소예의 얼굴에 유독 약하고, 양심까지 상처 입은 채빈은 생각했다.
 이번 학기까지만 가지고 있어야겠다.
 어쩐지 가슴이 뻥 터질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채빈은 툭하면 제 동거인 생각을 했다.
 시간대는 대중없었다. 막 동이 튼 새벽녘일 때도 있고 인파 바글바글한 점심일 때도 있고 시커먼 밤하늘에 별만 잔뜩 떠 있는 오밤중일 때도 있었다. 다만 강의 시간에는 충실하게 보내려고 노력했다. 물론, 잘은 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잔잔한 연못에 누군가 돌을 던진 것과 같은 것이라. 채빈은 도통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다. 한 달. 한 달이 지났는데 채빈은 늘 그런 상태였다. 요 며칠은 그냥 강의 시간을 날렸다. 의중을 알 수 없는 까닭에 골머리를 앓는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 상념에 빠지기 전 마침 강의가 끝난다. 채빈은 느릿하게 짐을 챙겼다. 선배 다음 강의가 이 강의실이었지. 나가면 만나려나. 와중에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 자신이 조금은 이상했다.
 강의실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인물이 보인다. 차콜색 카라 맨투맨을 입은 소예의 눈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채빈을 반긴다. 반가운 마음을 누르고 여상히 입을 연다.

 “선배, 이전 강의 언제 끝났길래 벌써 왔어요?”
 “응, 교수님이 30분 일찍 끝내 주셔서. 그래도 여기 온지는 얼마 안 됐어. 편의점에 잠깐 들르느라.”

 그렇구나. 채빈은 그저 고개나 끄덕일 뿐이다. 그런 채빈을 본 소예는 그저 웃음이나 나풀나풀 흘렸다.

 “이거 마실래? 원 플러스 원 행사길래 샀는데, 내가 둘 다 마시기는 좀 그래서.”

 소예는 때때로 채빈에게 무언가를 하나씩 쥐여줬다. 오늘 소예의 손에는 두개의 티즐 피치 우롱치가 들려있었다. 그럼 채빈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선배는 왜 날 챙겨주는 걸까.
 채빈은 이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생각이 굼떴다. 그저 룸메이트라서? 그렇다기에는, 너무…….

 “잘 마실게요.”

 그렇다고 해서 소예의 낯에 대고 말할 깜냥은 되지 않는다. 잔잔히 미소 지어 보이며 내민 음료를 받아 들 뿐이다. 잘 가, 강의 잘 듣고.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소예를 뒤로한 채 손에 들린 패트병을 바라보았다. 산 지 얼마 안 됐는지 꽤 시원했다.
 다음 강의실에 도착해서는 턱을 괴고 햇빛이 내리쬐는 창밖을 바라본다. 채빈은 생각에 빠진다.
 이름. 나이. 핸드폰 번호.
 신상에 대해 아는 건 그것뿐이다. 이렇게 아는 게 없었다. 숨 막히게 예쁜 것, 키가 174cm 정도 되는 것, 좋아하는 음료는 밀크티, 전공은 국문, 손가락이 길고 곧아 예쁜, 외양은 대체로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대학은 의외로 추합으로 들어온, 채빈을 볼 때마다 무언가를 하나씩 쥐여주는, 그런 인물.
 수많은 정보를 정리한다. 그럴수록 머리만 더 아팠다. 관계에 의문을 품는 건 아니었다. 그 행동에 의문을 품는 것이었다. 공연히 기분이 묘해졌다.
 곧 교수님이 들어오고 강의가 시작된다. 채빈은 소예가 준 음료를 마실 때마다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오후 6시,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두 마디쯤 남은 달짝지근한 향이 나는 액체를 목 뒤로 넘겼다. 답례로 뭐라도 사 가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채빈은 교내카페에 들렀다. 닫았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7시까지 열어서 다행이었다. 채빈은 직원에게 인사한 뒤 포스기 앞에 섰다. 고민 없이 밀크티 한 잔과 아메리카노 한 잔을 담았다.
 기숙사에 들어오면 노트북으로 과제 하다가 채빈을 반기는 소예가 있다. 채빈은 가방을 내려놓고 소예에게 다가간다. 어쩐지 부끄러워지는 기분이다.

 “선배, 이거… 챙겨주신 거 고마워서요.”
 “어? 아. 이럴 필요 없는데…….”
 “그냥 받아요. 요 근래 계속 뭐 주셨잖아요.”

 제 몫까지 사 온 게 다행이었다. 소예는 계속해서 미안한 표정을 짓다가 곧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그렇게 말한다면야……. 고마워.”

 채빈은 그때 소예를 보고 문득 든 생각이 있다. 선배는 내가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가슴 저릿하게 웃어주는 걸까. 뭐 그런.

 “나중에 또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도움 줄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으니까.”

 소예는 기숙사의 미온한 조명 아래 따듯한 미소를 지었다. 채빈은 잠시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곧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미묘한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알겠어요. ……선배도요. 느릿하게 답하며 자신의 책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예와의 관계가 단순한 동거인을 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불현듯 목이 타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어느덧 시각은 11시를 달린다. 잘 준비를 마치고 나온 채빈은 이미 침대에 누워있는 소예를 잠시 바라본다. 눈길을 느낀 소예의 똑바른 시선이 올라붙는다. 날것에도 저런 아름다움이 있던가. 채빈은 새삼 감탄했다.

 “이제 자려고?”
 “네……. 자야죠. 선배는 안 자게요?”
 “나도 자야지. 그냥 물어봤어.”

 사실 좀 졸려. 장난스러운 미소가 들러붙는다. 채빈은 반사적으로 기숙사의 형광등을 소등했다. 저런 얼굴은 처음이라서. 여차하면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아서. 소예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다 들킨 기분이다.
 잘 자. 하루 끝에 침대에 누우면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가 인사를 건넨다. 채빈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처음 느꼈다.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소예의 뒷모습을, 채빈은 멍하니 응망했고.
 끝내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 선배 좋아하나.
 지독한 짝사랑을 자각한 순간이었다.





 “언니, 중간고사는 어떻게 봤어요?”
 “나? 난 글쎄, 그럭저럭 본 것 같네. 채빈이 너는?”
 “저도 나쁘지는 않게 본 것 같아요. 첫 시험이라 아직은 좀 헷갈리기는 하는데…….”
 “걱정하지 마. 너 열심히 공부했던 거 내가 제일 잘 아는데 뭘.”

 이 대화가 내포하는 의미는 상당했다. 첫째, 호칭이 ‘언니’로 정리되었다는 것. 둘째, 중간고사 기간이 끝났으니 현재 시점이 4월 말이라는 것. 셋째, 채빈이 짝사랑을 자각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는 것.
 소예가 익숙하게 아이스크림 두 개를 결제하고 하나를 채빈에게 건넨다. 매번 사주실 필요 없는데……. 말끝을 흐리자 소예가 능청스레 답한다. 이번에는 첫 시험 끝난 기념. 말갛게 웃는 소예의 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채빈이 시선을 돌렸다. 시골길에 강아지풀 닿는 것처럼 간지러운 미소다.

 “잘 먹을게요.”

 채빈이 아이스크림 봉지를 까는 걸 보고 나서야 소예도 먹기 시작한다. 시원하고 달짝지근한 게 계절에 비해 이른 감이 있었으나 마냥 좋았다. 마음 한켠에도 강아지풀이 자라났다.

 “저녁은 뭐 먹을래?”
 “우동 어때요?”
 “우동 좋지.”
 “이번에는 제가 살래요. 언니가 거의 다 샀잖아요.”
 “네가 누구 챙겨주는 건 후배 들어온 뒤에 해. 그때 해도 안 늦어.”

 매번 이런 반응이다. 머잖아 채빈은 기분이 땅으로 꺼졌다. 강아지풀이 거센 바람에 세차게 흔들린다. 그저 ‘아는 후배’라서 챙겨주는 건가, 싶었다만…… 소예에게 있어서 채빈은 아는 후배가 맞으니까. 괜히 맑디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애초에 전제부터 어긋나있는 마당에 무언가를 더 기대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었다.

 “됐어요. 저녁 시간 될 때까지 어디 있을래요?”
 “글쎄……. 대로변에 노래방이랑 포토 부스 같은 상가에 있는 곳 아는데, 갈래?”
 “포토 부스요? 지금은 좀 그런데. 갈 거면 옷이라도 갈아입는 게 낫지 않아요?”
 “왜? 지금도 귀여운데.”

 ……그러니까 이런 말 좀 그만하면 안 돼요?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말이 낙엽처럼 굴러간다. 지금 여기서 말을 꺼내봤자 생뚱맞은 이유로 신경질을 내는 사람으로 보일 뿐이니까. 오티에서도 입에 잘 대지 않던 소주가 미친 듯이 마시고 싶었지만, 제 옆에 있는 동거인이 음주를 선호하지 않아 그저 마른침만 넘길 뿐이었다.

 “알겠어요. 가요.”

 채빈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대화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노래방 앞이다. 소예는 익숙하게 카운터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생수를 챙겼다.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고 소예를 따라 빈 부스 안으로 들어선다.

 “생각해 보면 너랑 노래방은 처음 오는 거네?”
 “그러게요. 언니는 여기 온 적 있나 봐요?”
 “난 전에 오티할때 2차로 여기 왔었지. 멋모르고 끌려왔다가 상당히 힘들었는데, 채빈이 너랑 오니까 감회가 또 새롭네.”

 소예가 옅게 웃으며 발라드 차트를 훑어본다. 소예는 크러쉬의 「Beautiful」을 선곡했다. 못 부른다고 실망하면 어떡하지. 잔잔하게 깔리는 피아노의 선율 위 농조로 말을 건네며 웃은 그가 마이크를 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빈은 속으로 외친다. 노래까지 잘 부르면 어떡하라는 거야.
 짝사랑에 골머리를 앓는 채빈의 시야에 노래방 기기가 걸린다. 고개를 돌리면 소예가 노래방 기기를 건네며 앉아 있다.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채빈이 고개를 저었다.

 “저…… 생각 안 해 뒀어요.”
 “아, 그래? 그럼 내가 한 곡 더 부를까?”

 채빈이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소예는 다음 곡으로 펀치의 「맞아 잠을 설친 건 너 때문이야」를 불렀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 공감되는 제목이라 눈길이 갔고, 모르는 노래라 화면에 뜨는 가사에 시선이 꽂혔다.
 밤새 우리 둘 주고받는 말들. 너도 날 생각하고 있을까 하루 종일 두근대다 잠든 날이 대체 몇 밤짼지. 우리 아직도 한심하게 딱 봐도 좋아하는데 바보같이 눈치만 보고 좋은 친구라 말하는 나. I hate you, but I love you. 맞아 잠을 설친 건 너 때문이야. 짜증 나, 내 맘 몰라주는 네가 미워. 자꾸 잘해주는 네가 정말 싫지만 네가 좋아.
 또 사랑 노래였다. 그리고 결국 생각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언니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나?
 타인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는 것은 으레 하기 쉬운 착각이라. 채빈은 혼자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10cm의 「스토커」를 부르기에 이른다.
 나도 알아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채빈아, 오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그런가요?”
 “응. 뭔가 좀 텐션이 낮은 게, 좀 그래.”
 “아니에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요.”

 그런 말을 하면 더 신경이 쓰이는데. 소예가 속으로 생각했다. 포토 부스에서 사진을 찍고, 우동을 먹는 내내 채빈은 묘하게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소예 본인이라는 것은, 아마 채빈이 말해주지 않는 이상 모를 일이고.

 “채빈아, 이거 너한테만 말해주는 건데……. 나 시트론 카페에서 알바해.”
 “네?”
 “음. 나 주말에 오후 2시마다 나가잖아. 그거 알바 때문이야.”
 “잠시만요. 그걸 왜 저한테…….”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한번 와. 내가 살게.”

 결국 소예가 선택한 것은 선배의 권한으로 후배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는 것 정도였다.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채빈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는 게 문제였다. 할 말이 많았지만 지금 소예에게 전할 수 있는 말은 없기에 입을 닫았다. 채빈은 애써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아니에요. 저 진짜 괜찮아요.”
 “사양하지 말고. 그렇게 힘없이 괜찮다고 하면 더 신경 쓰여, 채빈아.”

 채빈이 숨을 들이켰다. 선선한 봄바람이 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알겠어요. 한번 갈게요. 시트론 카페 맞죠?”

 소예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화색이 돌았다. 그렇게 좋은가 싶었다. 왜 하필 나한테 말한 거지. 그저 내가 신경 쓰여서? 내뱉지 못할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응, 고마워. 와서 아무것도 안 해도 돼. 편하게 와.”
 “언니가 알바생이면서 그런 말 해도 괜찮아요?”
 “알바생이니까 이런 말 하는 거지.”

 채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봤다. 별조차 제 존재를 숨겨 그의 속처럼 새까맣다. 밤하늘을 도화지 삼아 그릴 것조차 없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내일이 주말인 게 어쩐지 야속하게 느껴졌다.





 딸랑, 익숙한 종소리가 귓전을 때렸으나 낯선 공간이 시야에 닥쳤다. 외곽에 빠져있어 손님이 많은 편은 아니라 소예 본인도 일하기에 더없이 좋아하는 카페라더니, 어쩐지 그 말이 이해가 되는 공간이었다. 그 산뜻한 불빛이 온전히 채빈에게로 쏟아진다.

 “채빈이 왔어?”
 “아, 언니. 일하는 데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서 공부할 교재 챙겨오기는 했는데…… 혹시 민폐는 아니죠?”
 “민폐긴. 시험 끝났는데도 열심히네. 대단하다.”

 멋쩍게 웃은 채빈이 카운터를 살폈다. 알바생은 소예를 포함하여 두명인 듯싶었다. 자연스레 다른 알바생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키가 크시네. 또, 수려하게 생기셨고……. 소예 언니처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메뉴판을 확인한다. 양을 닮은 눈동자가 바삐 굴러간다.

 “어, 아메리카노 아이스랑…… 생크림 스콘 결재할게요. 둘 다 하나씩.”
 “……그래.”

 채빈은 순간 자리에 얼어붙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카드를 받아 드는 소예의 눈이 차게 식어있기 때문이라. 제가 했던 일련의 과정들을 되돌아본다. 다만 짚이는 것은 없었다. 둘 사이엔 포스기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한참 후 소예가 입을 뗐다.

 “9천 원 결제했어. 가서 기다리면 돼.”

 어색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그야 당연하게도, 채빈은 소예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작게 미간을 찡그리며 카페 내 테이블에 자리 잡아 앉았다. 소예에게 신경을 떼지 못한 채로.
 당황은 곧 후회로 바뀐다. 아, 괜히 온 걸까. 힘 잔뜩 들어간 손이 떨린다. 채빈은 손을 쥐었다 펴는 것을 반복하며 저가 들고 온 교재를 테이블 위 올린다. 상념에 취할 바에는 다른 쪽으로 머리를 쓰는 편이 나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예가 트레이 위에 커피와 디저트 두 개를 올리고 찾아온다. 컵케이크는……. 채빈이 말을 흐리며 소예를 바라본다.

 “미안해. 내가 사준다고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이건 서비스.”

 소예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채빈은 순간 욱했다. 언니, 저 여기 온 거 후회돼요. 괜히 불퉁한 대답이 나올 것 같았으나 잡은 펜만 몇 번 더 돌렸다. 채빈은 어색하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표정을 풀었다.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밀고 들어오는 시원하고 쓴 액체가 느껴졌다.
 아무리 기분이 상했다지만, 짝사랑 상대를 앞에 두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채빈이 공부에 집중을 못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눈으로 글자가 들어오는데 머리로는 입력이 안 되는 기분. 채빈은, 아예 자리까지 잡고 구경하듯 저를 바라보는 소예가 좋으면서도 싫었다. 시야의 외곽으로 소예의 동태를 살피던 채빈이 결국 입을 열었다.

 “언니, 언제까지 그러고 있게요?”
 “왜? 불편해?”
 “아뇨, 불편한 건 아니고…….”

 소예야! 잠시만 와줄 수 있어? 얘기할 게 있어서. 채빈의 말을 끊고 낯익은 목소리가 등장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면 그 알바생의 부름이었다.

 “아, 잠시만. 동료가 부른다.”

 소예가 자리에서 일어나 알바생을 따라 탈의실로 들어간다. 순간 채빈에게 불안감이 엄습했다. 손이 겨울바람에 내몰린 나뭇가지처럼 떨렸다. 단내가 올라오는 공기를 들이켠다. 언니의 동료가 언니에게 고백하는, 그 최악의 상황이 머릿속에 재생된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한참 뒤에 나온 소예의 표정이 멍했다. 상상의 나래가 걷잡을 수 없이 달려간다. 말 그대로 조연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이번에는 입술이 경련했다. 채빈은 가까스로 울음을 참고 있다.
 역시 나는 안 되는 걸까. 하긴, 만난 지 두 달도 안 됐는데.
 심장이 너무 아팠다.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때였다. 마구잡이로 교재를 가방에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예가 개수대에 서 있는 틈을 타 카페에서 나와버렸다. 풀 수 없는 난제를 포기해야만 할 때였다.
 카페 밖으로 나선 채빈은 3월이 되어서 소예가 자주 사줬던 아이스크림을 샀다. 혼자 입에 물고 기숙사로 향하는 길은 어쩐지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아이스크림에 알코올이 든 것도 아닌데 속이 울렁거린다.
 채빈은 그저, 소예가 지금 어떤 표정인지 궁금했다.





 “채빈아, 무슨 일 있었어? 디저트 다 먹지도 않았는데 나갔길래…….”
 —괜찮아요. 좀 피곤해서 그래요.
 “공부할 게 많아?”
 —그냥…… 네. 여러 가지로.

 소예는 순간 깨달았다. 전과 달리 채빈과 대화가 전혀 이어지지 않는 이유. 그는 자신에게 벽을 치고 있었다. 벽에 대고 얘기하는 것처럼 대화 허리가 뚝 뚝 끊겼다.
 기분이 상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도 채빈이랑 같이 있으면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기분도 좋아질 것 같았는데. 소예는 매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한 발짝에 우울이 서려 있었다. 알바가 끝날 때까지 같이 있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채빈이 이렇게 빨리 돌아갈 줄은 몰랐기에.

 —언니는 애인 안 만들어요?
 “뭐?”
 —그렇잖아요. 솔직히 저는 언니가 뭐가 부족해서 애인이 없는지 모르겠어서요.

 좋지 못한 기분에 기름을 붓는 질문이었다. 당연하게도 기분이 확 상했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채빈의 목소리가 좋지 못한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소예도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기민한 지점이 쿡쿡 찔렸다.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어조가 튀어나왔다.

 “채빈아, 넌 내가 애인을 만들었으면 좋겠어?”
 —……언니가 외로우면요.
 “그게 논점이 아니잖아. 내가 애인을 만들면 네 기분이 좋을 것 같아?”

 순간 아차 싶었다. 아니, 아니야. 내가 말실수했어 채빈아. 이건 미안해. 근데 그건 아닌 것 같아. 나도 별로고 너도 별로일 텐데 내가 애인을 왜 만들어. 다급히 덧붙인 그가 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입술을 꾹 깨물자 건조해진 입술에 핏물이 베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채빈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옅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소예는 입술을 혀로 축이고 자신이 내뱉은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명백한 자신의 실책이었다. 자신도 그 말을 왜 내뱉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공격하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변명은 더더욱 아니었다. 무어라 덧붙이기도 전, 채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그게 무슨 뜻이야?”
 —언니는 좋을 거잖아요. 괜히 저 안 챙겨도 되고, 쓸데없이 간식거리 살 일도 없고.

 소예는 순간 뒷목에 열이 올랐다. 떠오르는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분수처럼 튀어 나갔다.

 “채빈아. 그게 무슨… 무슨 소리야? 내가 그걸 억지로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 어느 누가 단순한 후배를 그렇게 챙겨요? 저는 그런 거 본 적 없어요. 설사 언니가 퍽 다정한 성격이라고 해도 저한테는 유난이에요.
 “유난? 너한테는 내가 여태까지 유난 떠는 거로 보였어?”
 —그럼 그게 유난이 아니면 뭔데요!

 머리를 무언가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멍했다. 소예의 모든 행동이 멈췄다. 움직이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럼 넌 내가 여태까지 부담스러웠어?”
 —……네.
 “내가 우스웠겠다. 난 그것도 모르고 여태껏, 신경 쓰느라…….”
 —……뭐가 그렇게 신경 쓰이는데요.
 “네가!”

 바람이 나뭇잎을 쓰다듬는 소리만 들렸다. 채빈이 한참 후 입을 뗐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채빈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있었다.

 —언니 그 알바생이랑 무슨 얘기 했길래 이래요?

 그 말에 평정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경련하듯 일그러지는 눈살을 문질렀다. 꽉 막히는 목구멍을 억지로 벌렸다.

 “자기 번호 좀 너한테 전해달라고.”





 ***





 연소예가 민채빈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겨울방학, 눈이 내리는 시내 대로변이었다. 친구들과 고등학생 시절 마지막 추억이라며 오후 시간대부터 약속을 잡고 기다리고 있던 소예는 제가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인디핑크 니트를 입은 사람을 마주했다.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10대의 끝자락이면 막 유행에 민감해질 시기 아니던가. 소예는 그러한 유행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소예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일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느직하게 옮겨진다.
 그러니까 소예의 호기심이 그를 좇았다.
 그의 걸음걸이는 목적지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위태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힘없이 에코백을 어깨에 메고 대로변을 배회했다. 길이라도 잃은 듯 걸음을 옮기던 그는 행인과 부딪쳐 크게 요동친다. 몸을 움츠리자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에코백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하필이면 그것도 지퍼 없는 에코백이라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이 다 쏟아졌다. 당황한 것인지 10초 정도 멍하니 있던 그에게는 누군가의 도움도 없었다. 소예 또한 당황해서 그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가 물건을 줍기 시작하고 나서야, 소예 또한 나서기 시작했다.
 곁으로 다가가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도와줄게요. 퍽 다정한 말에 그는 여과 없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 내용물을 주우며 자연스레 얻게 되는 정보가 있었다. 이름은 민채빈, 나이는 18세 따위의 것들. 한참 동안 눈밭에서 쪼그리고 있었더니 손이 시렸다.

 “……혹시 무슨 일 있어요?”

 문제집을 다 줍고 그에게 건네자 그제야 그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반쯤 감긴 눈가가 붉었다.

 “아, 아뇨. 그냥…….”
 “음, 말하기 곤란하면 물어보진 않을게요.”
 “……네. 감사합니다.”

 신경이 쓰였으나 구태여 되묻지는 않았다. 붉어진 눈가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리자, 더러워진 가방이 눈에 들어온다.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가방을 물끄럼 내려보다가 손으로 털기 시작했다. 다만 지나가는 사람에게 밟힌 것인지 거뭇해진 자국은 지워지지 않았고.

 “여기 근처에 보세 매장 있는데, 같이 가 드릴까요?”
 “아, 괜찮아요. 돈이 없어서…….”
 “음……. 그럼 제가 사드리는 건 안 될까요?”

 신경이 쓰였다. 동정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만큼 단순한 감정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동질감 따위의 것이었던 것 같다.

 “아, 아뇨. 진짜 괜찮은데.”
 “신경 쓰여서 그래요. 범죄나 그런 건 아니니까 사양하지 말고요.”

 아……. 감사합니다. 신경 쓰인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그는 결국 승낙의 의미를 표시했다.

 “이름이 뭐예요?”

 이미 알고 있지만.

 “민채빈이에요. 혹시 이름이…….”
 “연소예요. 나이는요?”

 그것도 알고 있지만.

 “열여덟이요.”
 “그렇구나. 저는 열아홉이요.”

 둘은 통성명을 했다. 둘 다 말이 없는 편이었으나 신기하게도 대화가 이어졌다. 한참 동안 이어지던 대화는 채빈이 왜 울었는지로 빠졌다. 채빈은 불안하다고 했다. 겨울방학에도 학원에 나가 공부하고 있는 게 무조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이유가 되지는 않을 거라며. 소예는 공감했다. 그리고 조언했다. 자신도 느꼈던 감정이었기 때문에.
 소예는 같은 반 친구들도 한 학기는 지나야 친해지는 성격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채빈은 꽤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 같았다. 공통점이 많아서 그런가. 아마 꽤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기숙사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는 솔직히 좀 많이 놀랐다. 다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때 그 인디핑크 니트를 입고 있어 알아보려나 기대하기도 했었는데, 3일이 지나고 나서야 확신했다. 채빈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우연히 채빈이 그 니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땐 내심 안심했다.
 이후에는 지나가다 교내에서 몇 번 얼굴을 마주쳤다. 문창과 지인에게 부탁하여 채빈의 전공 시간표는 대충 꿰고 있었다. 일부러 시간 맞춰 편의점에 들러 음료를 사고, 일부러 때맞춰 우연인 척 인사하고.
 어떤 마음은 빛바래지지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그에게 간식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덧붙이자면, 두 사람이 가까워진 것에는 소예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원체 남에게 살갑게 대하지 않는 채빈이기에 소예가 나서서 이것저것 권유했기에. 아마 채빈은 소예가 말하지 않는 이상 평생 모를 일이겠지. 도서관에 있다가도 익숙한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그제야 깨닫는 것이었다. 큰일 났다는 것을 처음 자각한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무슨 자리에 있었고, 어떤 과제를 하고 있었는지. 어떤 기억은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았고.
 끝내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 채빈이 좋아하네.
 지독한 짝사랑을 자각한 순간이었다.
 사랑은 사람을 유치하게 만든다.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해지게 하고, 그의 옆자리를 욕심내게 한다. 카페에서 있었던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채빈이 동료를 잠시 눈에 담기에 들었던 유치한 질투였다. 채빈이 저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확인받지 못했기에 나온 우스운 감정이었다.
 동료가 채빈을 불렀을 때까지 큰 불안감은 없었다. 수줍은 표정으로 노트에 휘갈긴 자신의 이름 석 자와 열한 자리의 숫자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 이거 말이야. 네 친구… 분한테 전해줄 수 있어?”
 “어?”
 “아이, 별건 아니고. 그냥 그분이 내 취향이어서.”

 그 뒤로 그가 무어라 더 덧붙였지만 제대로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소예는, 누군가가 채빈을 자신과 같이 호감이 짙은 눈으로 바라볼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을. 그 사실에 머리가 아파왔다. 손끝이 저릿했다.
 마침내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너도 이렇게 골머리를 앓았던 적이 있었겠지.

 ‘아니에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요.’

 채빈이 말했던 이 말의 의미는 뭔지. 내가 여태까지 잘해줬던 게 걔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지. 소예는 꽤 오랫동안 상념에 빠졌다.





***





  결국 관계의 진전은 얻지 못한 채 체육대회가 끝이 났다. 5월 초가 되었다는 얘기이다. 소예와 채빈은 같은 팀으로 묶였는데도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지독한 눈치싸움이었다. 아니, 어쩌면 눈치싸움은 채빈 혼자서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예는 체육대회가 끝이 나자마자 문창과 무리에게 붙잡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으니.

 “어, 채빈아!”

 아. 채빈이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무리의 시선이 단번에 한쪽으로 쏠린다. 짐이나 챙기고 바로 기숙사로 향하려 했는데 그른 것 같다. 해맑은 목소리를 무시할 수도 없어 고개를 돌려보면, 소예에게 친근한 척하던 1학년 과대의 얼굴이 보였다. 어, 어. 안녕. 어색하게 웃으며 과대의 아는 척을 받아준다. 당연히 소예의 시선도 채빈에게로 닿았다. 조금 전 웃었던 기운이 아직 남아있는 입매를 한 채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우리 오늘 뒤풀이로 노가리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과대의 신이 난 목소리에 채빈이 과대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눈 피한 건 좋은데 과대의 말에 잠시 생각이 멈췄다. 술자리를 싫어하는 편도 아니었고 요즘 들어 갈증이 미친 듯이 일기는 했으니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지금은 소예 언니라는 거절할 이유가 떡하니 있지만. 음…… 난감한 기색을 표하며 고민하고 있자 과대가 한 번 더 채빈을 조른다.

 “같이 가자. 어차피 사람들도 별로 안 올 것 같아. 소예 선배 친구들만 몇 명 더 오고.”
 “가는 건 상관없는데…… 내가 껴도 되는 자리야?”
 “당연히 껴도 되지. 올 거지?”
 “어, 어…….”
 “아싸! 6시까지 가게로 오면 돼!”

 누군가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소예 언니인가. 언니였으면 좋겠고, 아니었으면 좋겠고. 홧김에 수락하긴 했지만 벌써 조금 후회되는 것 같기도 하다. 신이 나서 떠드는 이들을 뒤로하며 괜히 혼자 지나치게 생각했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냥 거절하고 자연스럽게 퇴장하는 게 제일 좋은 선택이었을 수도.
 그때, 어떠한 기척이 채빈을 건드린다.
 이를테면 누군가 다가오는, 망설이는 발끝에 채찍질하듯 속도가 높아지는 기척이. 이윽고 힘 잔뜩 들어간 손이 채빈의 손을 그러쥔다. 직설적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호흡이 커다랗게 부푼다. 픽 웃음이 새어나간다. 끝까지 지키려 했던 알량한 자존심도 함께. 무시하는 짓은 결국 못한다.

 “채빈아, 잠깐 얘기 좀 하자.”

 등 뒤에서 소예의 목소리가 찾아든다. 채빈은 괴로웠다. 이미 가진 정을 다 내어줬다. 우습지만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실책이 끝도 없다.
 채빈은 그 말에 순순히 소예를 따라 근처 놀이터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소예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채빈은 운동화 앞 코로 놀이터 모랫바닥을 푹푹 쑤셨다. 소예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평소보다 기분이 좋지 못한 건지. 아니면 오랜만에 이렇게 마주해서 서로 어색함을 느끼고 있는 건지. 어쩌면 둘 다인지.
 그리고, 정적을 깬 것은 소예의 담담한 목소리였다.

 “예전에, 우연히 봤던 사람이 있어.”

 순간 채빈은, 심장이 내려앉는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지금 날 그 사람을 투영해서 보고 있는 건가? 하지만 채빈은 주먹 한 번 말아쥐지 못했다. 그저 생각에 잠긴 소예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였는지는 아직도 기억해. 2년 전 눈이 내리던 날…….”

 눈이 마주쳤다. 채빈은 도망칠까 생각했다. 다만 뒤이어진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대로변에서 곤란에 처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심지어 가방까지 못 쓰게 됐는데 남 탓 한번 하지 않던 걔가 마음이 쓰였어. 입시 때문에 눈시울까지 붉히던 게, 이유는 모르겠는데 마음이 아팠어.
 다시 만났을 때 기뻤어. 지금 생각해 보면 운명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그게 언니였어요?”

 채빈의 눈이 커졌다. 잊고 있었던 기억이 뭉뚱그려 떠올랐다. 모든 게 다 버거웠던 시절. 고등학교 3학년을 앞둘 때는 뭐든 태연자약하게 넘기기 어려웠다. 도와줬던 이의 얼굴 대신, 따뜻한 손으로 건넨 가방 하나만 기억하게 됐다. 소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적막이 일었다.

 “좋아해.”

 채빈의 움직임이 굳었다. 감정적으로 굴고 싶지 않았지만 처참히 실패할 것을 직감했다. 시야가 흐려졌다 다시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소예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1m 남짓이었다.

 “왜 그걸.”

 이제야 말하는데……. 중얼거리듯 원망을 쏟아 놓는다. 잠시간 눈이 마주친다. 양을 닮은 눈동자가 사랑을 보채고 있었다. 초연하면서도 아이 같은 눈으로. 100m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가빠졌다. 채빈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소예가 한 발짝 다가왔다. 두 사람의 거리는 이제 1m가 채 넘지 않는다.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 같다. 물까지 적셔가며 단단하게 쌓아 올린 성이 한순간에. 누가 와서 밟지도 않았음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볼품없는 모양으로.
 소예는 미지근한 주황빛 가로등 아래서 눈물을 떨구는 채빈을 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를 제 품 안에 끌어안으며, 인디핑크 니트를 입은 채빈을 생각하다가도, 결국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을 끌어안는 온기를 느끼며 생각하고 마는 것이었다.
 나 채빈이 진짜 좋아하나 보다.
 지독한 사랑을 한 번 더 체감한 순간이었다.